얼굴들 – 저널

2023년 1월~3월에 진행된 무연고사와 공영장례에 대한 질적 연구 과정에서 동자동은 예상치 못한 조사 현장으로 부상했다. 서울시립승화원 2층에 위치한 공영장례 빈소에서 동자동 주민들과 마주친 이후 무연고사망자로 이웃과 친구를 떠나보낸 경험을 청해 듣기 위해, 동자동에서 치러지는 마을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동자동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죽음의례에서 ‘얼굴 없음’으로 현존하게 되는 무연고사망자들의 위치를 논하는 과정에서 이 얼굴 없는 무연고사망자들을 통해 만나게 된 사람들의 개별성은 희석되고 언술은 연구자의 연구 주제로 수렴되며 배치되었다.

주민들의 삶이 논문에서는 주제를 구심점으로 재편되었으나 논문 및 에스노그래피 바깥에서 면면히 영위되는 연구대상자들의 삶의 구체성과 총체성, 논문에서는 끝까지 전개하지 못한 마을 장례에 놓인 영정사진 없는 액자들이 낳는 의미를 상기시키고자 글이 아닌 매체를 동원한 기록의 기획으로 이어졌다. 동자동 주민의 2평 남짓한 방 안과 마을 장례를 비롯한 행사가 치러지는 새꿈공원, 그리고 이 두 공간을 잇는 길을 통로가 그렇게 3D 스캐닝 방법으로 기록된다. 더불어 이렇게 다시 이루어지는 공간의 기록 과정에서 연구 기간 이후 이들과의 재회, 혹은 이전의 지나침까지 되짚어보고 연구 기간 바깥으로 확장되는 관계의 연대기를 재구성해 보았다.

2023년이 되기 이틀 전, ‘무연고사와 공영장례’를 주제로 논문을 쓰기 위해 서울시립승화원 공영장례 빈소에 나간 첫 날, 연구자는 이웃 주민이었던 고인을 기리기 위해 여럿이 함께 방문한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을 만났다.

장○○씨를 조문하기 위해 동자동 주민들이 ‘그리다’ 빈소를 방문했다. 이들은 빈소에 들어서자마자 “아이고, 왜 영정사진이 없어?”라며 장○○씨의 영정 사진이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했다. 영정 사진의 부재에 대한 탄식은 운구와 산골 과정에서도 반복됐다..중략.. 2023년 2월 돈의동 쪽방촌 주민의 장례식이 치러졌을 때에는 미리 준비되었던 영정 사진을 돈의동 쪽방촌 주민협동회에서 제공하여 영정사진을 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드물게나마 고인의 영정사진이 빈소에 등장하는 때면, 정기적으로 공영장례 현장에 방문해온 사람들은 영정사진이 있으니 좋다고 감탄을 한다.

대부분의 경우, 공영장례는 영정사진 없이 진행된다. 위패 옆에는 사진이 걸려있지 않은 영정사진 액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고인의 가족이나 지인을 통해 영정사진을 받게 되는 경우, 나눔과나눔의 활동가가 직접 보정을 하거나 파주에 위치한 한 사설 스튜디오에서 보정 작업을 거치게 된다.

– 김수지, 무연고사와 공영장례, 2023: 90-91

영정사진이 없어 빈 액자와 위패로만 마주한 고인을 통해 연구자는 동자동 주민들과 만나게 되었다. 세 시간 만에 끝나는 공영장례의 모든 절차가 종료된 뒤, 동자동 주민협동회의 스타렉스 차량을 타러 발길을 돌리는 동자동 주민들 가운데 고인예식 과정에서 고인에게 술을 올리고 기도도 했던 조인형 님에게 연구자는 다가가 고인과의 관계를 물었다. 돈을 몇 십 만원씩 빌려가곤 했다고 고인을 회고한다. 말씀을 더 청해듣고 싶다며 명함을 드렸고 조인형 님은 그러마고 답하고 차를 탔다.

당시 연구자는 조인형 님이 2019년 용미리 추모공원 앞에서 글을 읽으신 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청주에 거주하고 있던 연구자가 서울역에서 청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을 때, 명함을 보고 연락을 준 동자동의 다른 주민 전도영 씨에게서 문자를 받았고,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전도영 씨를 비롯해 기존에 언론과 인터뷰 경험이 있는 동자동 주민들의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는 과정에서 조인형 님이 연구자가 연구를 하기 훨씬 전에 글을 읽으셨던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게 된다.

그렇게 연구자는 2023년 1월 첫째주 동자동 사랑방에서 첫 주민과의 인터뷰를 시작한다. 조인형 님과의 인터뷰를 희망했기에 십 수 차례 전화를 했으나 조인형 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연구자는 인터넷 검색으로 조인형 님이 연구자가 촬영했던 동자동 주민임을 알게 되었고, 현지 조사 시점으로부터 3년 더 전에 찍힌 이 영상을 찾았으나 당시에는 발견하지 못했다.

2023년 1월 18일, 안양의 공영장례 일정이 잡혔고 전날 공영장례에 참석하는 봉사단을 관할하는 담당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18일, 청주에서 안양 장례식장으로 가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안양에서 장례식이 끝난 뒤 동자동 사랑방에 무작정 가는 게 괜찮을지 고민하면서도 설 연휴 전이라 구할 수 있었던 큼직하고 빨간 사과들을 종이백에 넣었다. 안양에서의 장례식이 끝난 뒤 연구자는 긴 망설임 끝에 동자동 사랑방으로 향했다.

연구자는 동자동 사랑방 간사님에게 갑작스레 방문한 걸 송구스러워 하면서도 조인형 님과 도무지 연락할 길이 없어 찾아오고 말았다고 밝혔다. 동자동주민협동회의 선동수 간사님은 조인형 님을 방에서 사랑방으로 불러내어 주었고 조인형 님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사랑방에 발을 들이며 그 날 바로 인터뷰를 진행하자고 했다. 조인형 님은 혼자 세상을 떠난 이웃들, 서울시립승화원의 살찐 고양이들, 자신의 형제· 자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의하에 녹취를 진행했고, 이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어도 조인형 님의 진술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예컨대, 연구자가 현장 연구를 나간 첫 날 동자동 주민들이 기렸던 고인 장○○ 씨에 대한 질문을 하면 이전에 세상을 떠난 다른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이다보니 정보 부분에서 연구자가 되물어 규명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았고, 결과적으로 조인형 님의 진술 상당 부분은 편집되었다.

정택진은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이 무연고 사망자의 유골이 서울시립승화원의 유택동산에 산골되는 것에 마뜩찮아 하는 장면을 포착해 기술한다. 유택동산에 산골이 되면 다른 유골들과 섞여 ‘잡탕’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동자동 주민은 오랜 친분을 유지한 다른 주민의 장례를 직접 치르고, 유골을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는 공간이었던 한강에 산골한다. 이러한 실천은 고인의 ‘개별적’ 정체성을 유지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묘사된다(정택진 2021). 유택동산에서는 무연고사망자의 유골뿐만이 아니라 일반 장례식을 거친 유골의 산골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무연고사망자의 유골이 ‘유택동산에서 산골 될 운명’이라는 점, 즉 분골 후 다른 공간에서의 산골이나 봉안이 차단되어 있다는 점이 바로 동자동 주민들이 저항감을 느끼는 지점이었다.

[사례  3-18]
L: 돈 많은 사람들이 거기(납골당)다 (유골을) 놓아요. 사실 그게 더 좋다고 생각해. (유택동산에다 유골을) 채우면 이 (유택동산의) 고양이들이 먹으려고 그래요. 거기 고양이들이 다 커.
연구자: 선생님께서 장례식에서 장○○ 님에게 술도 따라주시고 이제 기도도 해주시고 하셨는데…
L: 내가 눈물도 잘 흘려. 기도하는 사람 나밖에 없어. 지옥가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한테 아프지 않게 가라고. 아마 나도 죽으면 거기(공영장례식) 갈 거야. 어디 뿌려지든지 볶아먹든 알게 뭐야. (동자동 주민 L씨와의 면담 중)

– 김수지, 무연고사와 공영장례, 2023: 97-98

이후 연구자는 동자동에서 마을 장례가 치러진다는 점을 확인해 이와 연관된 인터뷰를 추가로 더 진행했다. 2023년 8월 논문을 마무리하고, 10월 논문을 전달하기 위해 동자동에 연구자가 다시 찾아가 인터뷰이들에게 인사를 하게 되었을 때, 조인형 님은 자신의 방에 연구자를 들였다.




조인형 님의 방을 둘러보며 연구자는 논문에 반영하기 위해 무연고사와 공영장례라는 주제로 집약될 만한 사안과 연관성이 있는 조인형 님의 말만을 기록하는 지향에서 벗어나 조인형 님의 삶의 얼굴이랄 만한, 개별적 삶의 흔적과 마주치게 된다. 조인형 님의 방에 빼곡하게 찬 물건들-언제 찍은 것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조인형 님의 사진들을 포함-은 조인형 님의 얼굴 표상에 비견될 만한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연구자는 조인형 님의 방을 3D 스캐닝으로 아카이빙할 것을 제안하게 된다. 조인형 님을 방 뿐 아니라 마을 잔치 및 마을 장례가 이루어지는 새꿈공원과 이곳으로 이어지는 길까지. 연구자가 연구를 종료한 뒤 연구를 통해 마주한 바들을 VR로 기록함에 있어서 Virtual Reality 매체에서의 ‘Virtual’이란, 세상에 ‘실재’하지 않는 것을 구현하는 영역이 아니라 VR 영상을 접하는 이들이 위치한 곳에서 다른 곳에 ‘실재’하는 시공간을 마주하게 하는 매체에 다름 아니다.
당시 연구자가 연결시킬 수 없었던 정보의 연관 관계를 최근 하드 드라이브를 정리하며 발견한 2019년 영상에서 확인하며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2019년 연구자가 촬영자로 위치했던 용미리 추모공원 앞의 그를 다시금 마주하고 “나도 없이 살지만”이라는 추모사 낭독을 들음으로써 연구 기간동안 해독할 수 없었던 인터뷰이 언술의 일부를 비로소 더 이해하게 된다.

이 영상은 2019년 10월 16일 경기도 파주시 용미리에 있는 ‘무연고사망자 추모의 집’ 앞에서 촬영된 것이다. UN이 지정한 세계 빈곤 퇴치의 날을 맞이해 매년 이맘때 즈음 이곳에서는 무연고사망자 합동 위령제가 치러지곤 했다. 서울시의 공영장례 제도화에 큰 역할을 한, 사단법인 ‘나눔과 나눔’에서 영상 촬영 자원 활동을 하던 연구자는 당시 직장인이었고 반차를 내어 위령제를 촬영했다. 이곳에는 3천 명 이상의 무연고사망자 유골이 안치되어 있고, 2017년부터 일 년 중 위령제가 치러지는 하루만 개방이 허가되었다. 빈곤철폐의 날 조직위원회와 나눔과나눔, 대한불교조계종사회노동위원회, 동자동사랑방, 빈곤사회연대, 홈리스행동이 위령제의 주체였고, 동자동 주민 가운데서는 조인형 님과 이재영 님이 각각 추모하는 글을 낭독하고 노래를 불렀다.

2023년 6월 돌아가신 김정호 동자동 주민협동회이사장님 방의 벽에 쓰여 있던 번호다. 2018년 공영장례가 서울시 조례 제정으로 제도화되기 전부터 무연고사망자를 위한 장례 지원을 행해온 사단법인 나눔과 나눔의 이사장 번호다.

[사례 Ⅲ-7]
연구자: ‘나눔과 나눔’ 상임이사의 전화번호를 벽에 어떻게 쓰게 되신 걸까요…
H: 그때 내가 이 홈리스 생활하다가 들어온 지가 얼마 안 돼가지고 그 당시에는 나이는 먹었지만 사회를 모르고 살아온 사람 중에 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실제로 눈을 뜨고 보니 이 사회가 아 좀 그렇다는 것을 내가 느꼈기 때문에…(제가 세상을 떠나면) 꼭 좀 거둬주십시오 이런 뜻으로 내가 그 전화번호를 써놓은 거예요. 솔직히 오늘 이런 말은 처음 하지만…그때 당시에 또 내가 심장 수술하기 전에 내가 많이 몸이 아파서 쓰러지고 이런 시기였어요…쪽방에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됐고요. (동자동 주민 H씨와의 면담 중)

– 김수지, 무연고사와 공영장례, 2023 72쪽

조인형 님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서울시 공영장례 조례가 제정된 2018년 이전에는 동자동 쪽방촌의 공동주방인 ‘식도락’에서 빈소가 임시로 만들어지고 새꿈공원에서 마을 장례가 치러지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 더 상세히 알려줄 인터뷰이를 협동회 간사님을 통해 소개받았고 이러한 인터뷰이 가운데 한 명이 김정호 님이었다. 2023년 2월 1일 이루어진 김정호 님과의 인터뷰는 김정호님이 목격한 동자동에서의 죽음들에 대한 기억에 집중해 이루어졌다. 인터뷰 도중 김정호 님이 암투병인 줄을 연구자로 하여금 인지하게 한, 인터뷰 도중 걸려온 광고 전화에 ‘난 암에 걸려 곧 죽을 사람이오!’ 라고 외치던 순간은 논문에서 소거되고 김정호 님의 말들은 스스로를 ‘예비 무연고사망자’로 인식하는 동자동 주민의 언술로 배치되었다.

김정호 님은 2023년 6월 10일 돌아가셨고 6월 26일 마을 장례와 행사가 열리곤 하는 새꿈 공원에서 예정되어 있던 추모식이 비로 인해 성민교회에서 치러졌다. 추모식 전에는 새꿈공원에서 황옥선 님과 김정호 님을 함께 기리기 위한 분향소가 분향소가 준비되었다. 27일 서울시립승화원 그리다 빈소에서 장례식이 있었다.

동자동 쪽방촌 주민운동 활동가의 부고 [기자의 추천 책], 시사IN(2023.7.11)

[사진] 김정호 별세… 동자동 쪽방 주민들 “잘 가거라”, 비마이너(2023.7.27)

동자동 쪽방 틈에 피어난 꽃, ‘선반지기’ 김정호, 비마이너(2023.7.27)

[홈리스 생애기록-⑤] 내 같은 인생도 있을까? – 김정호(2017.12.31)

동자동 협동회 7월 소식지/ 선동수 간사님이 전해준 사진들







김정호 님은 무연고사망자로 세상을 떠났다. 무연고사망자의 영정사진을 구하기 힘든 연유로 영정사진이 없는 채 장례식과 추모식이 진행되기 마련이지만 김정호 님은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찍힌 사진으로 주민자조조직인 ‘동자동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 이사장으로서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람들과 작별했다. 본래 추모식이 예정되어있던 새꿈공원에서 합동 차례와 마을 장례, 행사가 치러지기도 한다. 현재 무연고사망자 장례식이 제도적으로 서울시립승화원에 위치한 ‘그리다’ 빈소에서 공영장례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동자동 주민들은 쪽방에서 십분 이내 걸음 거리 내 위치한 이 새꿈공원에서 자체적으로 조직되는 행사와 활동에도 참여해 온 것이다.

주민 가운데 조합원들의 출자로 모인 공동기금을 다른 조합원에게 소액 대출하는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랑방마을 주민협동회는 2023년 11월을 기준으로 총출자금 435,837,491원, 회원수 313명에, 상환율 93.3%로 조합원들의 자체적인 경제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있다.  3D 스캐닝을 통해 기록된 공간에는 담겨있지 않지만 ‘사랑방 식도락’이라는 공간 역시 동자동 사랑방의 중요한 사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곳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천원으로 부담스럽지 않은 금액 덕에 형편에 구애받지 않고, 동시에 인격과 자존감을 지키며 취할 수 있는 게 된다. 이렇게 ‘동자동 사랑방’과 ‘동자동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은 ‘긍정적 상호의존'(정택진 2020; 143-147)을 구현가능하게 하는 사업의 주체 단위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이 협동회의 이사장이었던 고인에 대한 인사는 이에 따라 큰 규모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정호 이사장님에 대한 회고

쪽방촌의 추모식. 한겨례 (2020.05.06)

동자동 내에 위치한 주민자조조직 ‘동자동 사랑방’과 ‘동자동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이하 주민협동회)’는 이러한 자원 활동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단체다. ‘사랑방’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동자동 사랑방은 2008년 한 쪽방촌 주민이 주민과의 친교를 위해 설립한 공간이다. 이후 동자동 사랑방은 1명의 상임활동가와 주민 당사자로 이루어진 임원진을 갖춘 주민자조조직으로 발전했으며, 각종 현장지원을 통해 쪽방촌 주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주민들의 조직적 연대와 의식화를 통해 빈곤, 인권, 복지체계 등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소보겸·이지은·임혜민·임효정·홍현재, 2019*).

2011년 협동조합 아카데미와 주민설명회, 출자금 마련 등을 거쳐 창립된 주민협동회는 주민들의 출자금으로 형성된 공동자금을 통해 소액대출과 의료실비보험 등을 운영하는 협동조합이다. 창립시 139명의 조합원과 1천만 원의 출자금으로 출발한 주민협동회는, 2020년 1월 458명의 조합원과 3억 4천 5백만 원의 출자금을 운영하는 협동 조합으로 성장했다(사랑방마을 주민협동회, 2020). 두 단체는 개별적인 단체임을 표방하면서 독립된 예산과 자금을 가지고 운영되지만, 사실은 같은 공간을 나누어 사무실로 활용하고 있고 각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주민활동가 역시 대부분 중복되며 마을 장례, 주민복지 사업 등 쪽방촌과 관련된 여러 의제들에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현장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연구자는 두 단체가 실질적으로는 분업체계를 유지하는 하나의 단체에 가깝다고 간주했다.

– 정택진, 쪽방촌의 사회적 삶:서울시 동자동 쪽방촌을 중심으로, 2020, 135쪽

* 소보겸·이지은·임혜민·임효정·홍현재, 2019, “상호의존과 협동의 쪽방촌-동자동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 선동수,” 조문영 편집,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서울: 21세기북스.

…전략…
설령 주민들이 (의존에) ‘마비’되고 ‘길들여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강제적으로 없애거나 고쳐야 할 것이 아니다. 그러한 모습에 가려져 있는 주민의 “본모습”, 즉 자신이 병원에 있을 때 돌보아준 동료 주민을 위해 “3만 원을 내는” 모습을 “발견하고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주민자조조직의 목적이다.
“그런 거죠. 주민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
여기에서 김동석이 말하는 “본 모습”은 곽주형과 황민욱이 이야기한 임금노동과 경제적 생산 중심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동료 주민을 위해 기꺼이 주머니에서 꺼낸 “3만원”은 주민의 “본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지만, 그것은 임금노동이나 경제적 생산과 관련된 행위, 혹은 노동시장에서의 ‘독립’을 보여주는 모습이 아니다. 그는 임금노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하지도, 부를 창출하지도, ‘독립’을 성취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아플 때 병문안을 와 주었던 주민의 ‘줌(giving)’에 응답해, 그것을 “3만원”의 형태로 ‘되돌려주었을(reciprocating)’뿐이다.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 두 주민 간에 이루어진 줌, 받음, 되돌려줌의 행위 속에서 두 사람은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상징적 수준에서 연결된 ‘우리’가 된다(모스, 2002). 김동석이 말하는 “본 모습”이란 바로 이러한 상호의존적인 관계와 주민 사이에 형성되는 ‘연대(solidarity)’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민자조조직이 목적으로 삼는 변화란 ‘의존’에서 ‘독립’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의존’에서 또 다른 형태의 ‘의존’의로의 변화다. 김동석이 말하듯 전자의 상태에 있는 주민들이 각종 단체들의 물품 지원에 일방적으로 의지함으로써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과 “해야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양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의존이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상태가 주민 간의 연대와 상호돌봄으로, 즉 ‘긍정적 상호의존’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쪽방촌 주민 정민규(49세)의 말은 ‘낙인화된 의존’과 ‘긍정적 상호의존’ 사이의 대립을 주민의 입장에서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것저것 내가 받는 게 많잖아. 그걸 돌려주는 거야.”
동자동 사랑방을 중심으로 현장연구를 진행했던 연구자는 현장연구 기간 내내 정민규와 매우 빈번하게 마주쳤다. 그가 동자동 사랑방에 매일같이 방문하여 쓰레기를 줍거나 공동공간을 정리하고 식사준비와 각종 잡일을 도왔기 때문이다.
종종 “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냐”는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그가 동자동 사랑방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는 이유는, 김동석이 이야기 한 ‘3만 원을 낸 주민’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받은 것을 돌려주기” 위해서다. 약 2년 전이었던 2017년 여름까지만 해도 정민규는 하루에 소주 6병을 마셔야 할 정도로 극심한 알코올 의존 증세를 보였다. 위험할 정도로 그의 건강이 악화되자 동료 주민들과 주민자조조직은 그를 용인과 송탄의 한 폐쇄 치료시설에 입원하도록 도왔다.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을 치료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정민규는 폐쇄 치료시설에서 반년이 넘게 머물러야 했고 때때로 손과 발을 묶어놓은 채 약물치료를 받아야 하기도 했다. 현재 아예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치료 과정을 마친 덕분에 적어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에서 스스로 음주를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했다. 그가 말하는 “받은 것”이란 동료 주민들과 주민자조조직의 도움으로 알코올 의존증을 치료할 수 있었던 과거의 일을 의미했다.
정민규에게, 자신이 받았던 이웃 주민들과 주민자조조직으로부터의 돌봄을 “돌려주기” 위한 방법은 자신이 단체 내에서 어떤 공식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실행하는 것이다. 작은 노동들을 매개로 그는 “받은 것”을 돌려주고, 그 과정에서 정민규는 동자동 사랑방과 동자동 사랑방에 방문하는 모든 주민들과 의존관계와 상호돌봄의 관계를 형성한다.
…후략…

– 정택진, 쪽방촌의 사회적 삶:서울시 동자동 쪽방촌을 중심으로, 2020, 143-145쪽

모스, 마르셀 (이상률 옮김), 2002[1925], 『증여론』, 서울: 한길사.

2023년 9월 28일 새꿈공원에서 추석 연휴를 맞이한 마을행사가 열렸다. ‘제12회 동자동 주민 ‘한가위’ 어울림 한마당’에는 추모차례상이 차려져 지난 일 년 간 고인이 된 동자동 주민들의 영정들에 인사를 올릴 수 있게 했고 윳놀이 다트놀이 등의 민속놀이, 식사 나눔, 노래자랑의 수순으로 행사가 진행됐다. 이 날 추모차례상 뒤로 놓인 스물아홉 분의 영정들 가운데 다수는 사진 취득이 어려운 연유로 사진 없이 고인의 이름과 생몰연월일만이 기재된 채 세워졌다.








일반적인 장례식과 비교해 볼 때 서울시 공영장례 현자에서는 고인의 개별성이 약화된다. 이는 공영장례 빈소에서 접할 수 있는 고인의 정보가 제한적이라는 점에서부터 드러난다. 빈소 앞 게시판에는 의례를 통해 기리게 되는 고인의 성명과 사인, 사망 장소와 나이가 기재된 부고가 걸려 있다. 고인 예식에서도 같은 정보가 제공된다. 영정 사진은 고인이 사망한 지역 구청장의 협조를 구해야 하고, 생전 고인의 유족이나 지인을 통해 화질이 좋은 증명사진 혹은 그에 준하는 이미지를 제공받아야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영정사진 없이 의례가 진행된다. 신원이 판명되지 않은 사망자는 구청에서 부여된 이름 앞에 ‘무명’이 붙은 채로 기려지게 된다. 고인과 생전에 인연이 있던 참여자가 아니라면 고인의 이름과 사인, 거주지와 사망 장소 및 사망 원인만으로 고인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영정사진이 없다는 점은 공영장례 현장 특유의 표상을 지니게 유도한다. 공영장례 현장에서 기리는 대상이 되는 이들의 죽음이 인식되지 않음으로 인해서 공영장례 참여자 및 관계자에게 ‘죽음’과 등치된 존재로 즉시 각인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공영장례 현장은 죽음을, 그리고 타인을 ‘추상적으로’ ‘강력하게’ 환기하게 되는 시공간으로 부상하게 된다.

– 김수지, 무연고사와 공영장례, 2023: 126-127

공영장례 현장에서와 같이 ‘영정사진의 부재’를 통해 ‘죽음’ 그 자체와 등치되며 존재를 드러내는 고인들이 동자동 추모차례상 뒤 사진 없는 영정들로 ‘집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집결은 우리에게 ‘얼굴’로 타자가 그 존재를 드러낸다는 레비나스의 논의를 바탕으로 재현과 인간화의 관계를 볼 때 재현될 기회를 박탈당하면 인간화될 가능성 역시 약해진다고 한 버틀러의 논의를 연상시키면서도 이 얼굴없는 영정의 집결 자체가 재현되지 못하는 이들의 ‘현존’을 별안간 가시화시킴을 발견하게 한다. 즉 한가위 추모차례상 뒤 영정들은 얼굴없음 자체를 통해 얼굴에 대한 강한 발언을 행하는 현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 발언이란 긍정적 전회의 국면으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일본 고토부키 도야거리의 무연고사망자들을 위한 기념탑이 부계혈통주의를 넘어선 사람들간의 ‘새로운 연결’을 지시할 수 있다고 지적한 김지은의 논의와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김지은은 일본의 부계혈통적 전통 내 대를 이을 사람이 없는 경우 그 혼백에 대한 의례마저 단절되는 보편적 경우와 달리, 고토부키 도야거리의 무연고사망자 시신을 위한 기념탑은 무연고사망자의 혼백이 혈연과 관계없이 언제나, 영원히 누구에 의해서라도 기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표상이 된다고 해석했다. ‘새로운’ 연결성의 가능성을 여는 장으로서 무연고사망자 및 고독사한 이들의 시신 경로를 살핀 결과다. 여기서 고인의 개별성을 담보하는 의례의 방식인지는 관건이 되지 않는다. 무연고사망자를 위한 의례와 시신의 경로에서 개별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역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다.

고인이 속한 공동체 사람들이 참석하는 공영장례 현장은 고인에 대한 추억을 적극적으로 발화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사회적으로 취약한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의 구성원 간의 연대의식과 상호부조가 가시화되는 현장이 되기도 한다.

[사례 Ⅳ-10]
2023년 1월 27일 금요일 아침, ‘그리다’ 빈소가 모처럼 북적였다. 오전장으로 모시는 고인 중 한 분이 홈리스행동 활동가였고, 이 활동가에 대한 추모식을 전날 저녁 자체적으로 진행한 홈리스행동의 다른 활동가들이 서울시립승화원 고인예식 시작 전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대여섯 명만 들어와도 꽉 차는 빈소에 스물 여명의 활동가가 들어오려고 하다 보니 빈소 입구에 신발을 놓는 공간에 신발을 다 벗어두지 못해 빈소 밖까지 신발들이 즐비했고, 활동가 중 여럿은 빈소 밖에서 장례식 시간을 나야 했다. 활동가들은 고인예식 전에 빈소 뒷벽에 고인의 사진들과 고인들에게 동료들이 보내는 메시지가 쓰인 종이들을 걸었다. 다른 때에는 빈 빈소를 지키는 주체였던 자원활동가들과 종교봉사를 위해 방문한 수녀님도 빈소 밖으로 나와 동료들이 빈소에서 예식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A사 Y과장님은 홈리스행동이 전날 다른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추모식을 하고 다음날 공영장례에서 장례식을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발인제를 자체적으로 진행했는데 ‘그리다’ 빈소에서 다시 예식을 치르는 게 예법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빈소를 한 번 차렸으면 다시 차리는 거 아니야…발인을 두 번 하면 고인을 두 번 죽이는 거야…”
고인이 이십년간 활동했던 홈리스행동이 고인의 장례주관자로 고인의 유골을 인수하기로 했다. 고인의 희망에 따라 해양장을 할 예정인데 어디가 좋을지 상임활동가가 G팀장님에게 문의했다. 이어 고인이 홈리스행동과 함께하는 활동가가 되기 이전 사업을 하다 실패하고 가족이 해체되면서 노숙을 하게 되기까지 겪은 어려움들, 지병으로 활동을 하면서도 어려움을 겪었던 정황도 공유되었다.
[2023년 1월 27일 연구자 참여관찰 기록지에서 요약 발췌]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은 공영장례 빈소에서 지인의 마지막을 여러 차례 배웅해왔다.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은 ‘홈리스행동’과 더불어 서울시 공영장례 조례가 제정되기 이전부터 무연고사망자의 열악한 최후 처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왔다. 공영장례 조례가 생기고 ‘그리다’ 빈소가 생긴 이후 장례 여건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고인이 자신이 생전에 알고 있던 이가 아닐지라도,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에게는 주민협동회 간사에 의해 공지가 이루어지고, 공영장례식에 참여를 원하는 이는 장례식이 이루어지는 날 오전 8시 50분에 동자동 사랑방 앞에 집결해 함께 차를 타고 서울시립승화원으로 이동한다. 2022년 12월 동자동 주민의 장례식에 참여한 Q씨는 생전에 고인이 된 동자동 주민과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다. 생전에 알지 못했던 사이라고 할지라도 Q씨는 장례식에 참여하는 동안 고인에 대한 편지를 마음속으로 쓰곤 한다. 생전에 알았던 고인에 대해서는 “마음이 아프다. 하늘나라에서 오래오래 사셔라.”라고, 몰랐던 고인에 대해서는 “생전에 아는 사이였다면 이야기 나누고 밥도 함께 먹고 산책도 하고 그랬을 텐데, 아쉽다”고 인사한다.

공영장례 조례가 생기기 이전에도 동자동 주민들은 주민이 사망하는 경우 한정된 자원으로나마 마을 장례를 직접 치르며 공동체의 추모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왔다. 쪽방촌 주민이 무연고사망자로 확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개별 사망자에 대한 추모는 공영장례 현장에서 참석 희망자들이 집결해 행하고, 매년 추석에 한 해 동안 사망한 주민들을 기리는 추모제를 마련한다. 자체적으로 마을장례를 준비했던 전력과 추모식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은 오늘날 소멸한 마을 공동체에서의 상호부조를 상기시킨다. 돈의동 쪽방촌에서도 공영장례 조례가 생기기 전에는 주민이 사망하면 무연고사망자로 확정될 시에 직장 처리되는 것을 막고자 ‘돈의동사랑의쉼터’와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상주를 맡아 주민장례를 치른 바 있다.

(중략)

[사례 Ⅳ-12]
연구자: 예전에 마을 장례 하실 때…
H: 음식을 식도락에서 장만하고 부고를 써가지고 동네에 붙이고 그러죠.
연구자: 이게 그러면 하루 분향소는 하루 동안 차려지는 건가요
H: 시간을 정해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합니다. 이러면 그 시간에 맞춰가 관심 있는 사람은 와서 하고 가고 그래요. 전날 준비하셔가지고 이제 길게도 못하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술 한 잔 주고 조문객들한테 …(가족이)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하고 살 만한 집안은 여기서 죽어도 바로 데리고 가서 장을 치르고…그럴 때도 우리 다 같이 (장례식장에) 갑니다. 동료였기 때문에. 여기 살았다가 이사 간 주민들이 사망해도 연락이 여기로 사실 따로 오지. 대체적으로 쪽방상담소에서 나눠주는 게 많기 때문에 여기 오게 되면 등록을 하게 되요. 거기 등록돼 있는 정보를 통해서 전달이 되어서 이렇게 구청에 연락이 되면 알게 되는 거고…우리 (협동회) 회원들 같은 경우에는 이제 조합에 이 가입한 날짜 이런 거 그런 게 남아있으니까. (동자동 주민 H씨와의 면담 중. 강조는 연구자)

(중략)

이소윤은 제도적 연고자의 경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나머지’ 연고자들의 범주가 ‘무연고 상주’-동거기반 생활동반자, 느슨한 돌봄공동체, 지역사회 상호부조-로 구성된다고 정리한다(이소윤 2022: 118). 이렇게 법률혼 및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 외의 단위들에 대한 인정과 법과 제도 차원의 인정이 공영장례 상주되기의 영역에서 가시화되어 드러났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 김수지, 무연고사와 공영장례, 2023: 131-135

* 버틀러, 주디스(윤조원 역), 2018, 『위태로운 삶』, 서울: 필로소픽.

* 이소윤, 2022, “한국사회 무연고사망자의 상주되기와 장례실천을 둘러싼 가족정치,”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Jieun Kim, 2016. “Necrosociality isolated death and unclaimed cremains in Japan”,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N.S.)22(4), 843~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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